세서미 스트리트가 보여주는 것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의 큰 위기

2025년 5월 20일 화요일
거대한 기업의 몰락은 한 순간에 오지 않습니다. 다만 잘못된 작은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실적에 반영이 되고, 그 숫자들이 결국 회사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후에 찾아오죠.

지금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역은 바로 스트리밍이 산업을 바꾼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의 모습은 최근 유독 눈에 띕니다.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는 두 회사의 합병 이후 저지른 실수들을 뒤늦게 주워 담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최근 이들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대표적인 어린이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의 향후 콘텐츠를 넷플릭스가 확보했다는 소식은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인데요. 

넷플릭스가 상징적인 콘텐츠의 확보로 어린이 프로그램까지 강화하는 모습보다도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라는, 스트리밍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합병을 한 거대 미디어 공룡이 더 어려워진 현실을 더 선명히 보여줍니다.

[미디어 노트]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 #HBO
세서미 스트리트가 보여주는 것
넷플릭스가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까지 확보했습니다. 2016년부터 방영권을 가지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가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대표적인 레거시 어린이 프로그램을 확보한 의미는 여러모로 큽니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가 56년 동안 어린이들을 위해 방영해 온 대표적인 프로그램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고, 미국을 넘어 세계 곳곳의 어린이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죠. 넷플릭스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해야 하는 이 프로그램의 취지도 이번 계약을 통해 살립니다.

지금까지 PBS는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가 HBO에서 방영한 후 몇 달 후에 방송에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틀 수 있었는데요. 넷플릭스는 새로운 에피소드도 모두 스트리밍과 같은 날에 PBS에서 공개하기로 한 것이죠. 물론 이는 TV를 대체하는 넷플릭스가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번 계약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PBS와 NPR을 비롯한 공영 방송에 대한 연방 자금을 끊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이후 어려워질 수 있는 PBS를 지원하게 되기도 합니다. 56년간 4500회를 이어온 대표적인 어린이 프로그램은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TV에서 새로운 형식의 에피소드를 홀가분하게 이어갈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 넷플릭스는 긍정적인 미디어 반응까지 이끌어내면서, 콘텐츠 포트폴리오까지 확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인데요.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가 저지른 또 한 번의 실수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는 계속해서 CEO 데이비드 자슬라브를 비롯한 경영진의 잘못된 선택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최근 스트리밍 서비스인 맥스(Max)의 이름을 다시 (그 전 이름인) HBO 맥스로 되돌리는 결정을 내렸는데요. HBO라는 이름을 다시 붙인 것은 다행이라고 평가 받지만, 거대한 미디어 공룡으로서는 촌극을 펼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고품질 콘텐츠'로 1990년대부터 그 위상을 확고히 구축한 HBO라는 브랜드를 버린 선택을 내렸던 자슬라브는 워너브라더스와 디스커버리가 합병을 한 이후 새로운 전략을 도입한다면서 그 이름을 바꿨던 것이고, 당시 이미 론칭되었던 CNN의 스트리밍 서비스인 CNN+ 마저도 닫아 버리는 결정을 내렸죠.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이 모든 결정을 되돌리면서 그 결정들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맥스는 다시 HBO 맥스가 되고, CNN은 다시 독립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의 상징적인 존재인 <세서미 스트리트>마저 넷플릭스에 올라갑니다. 가장 거대한 미디어 기업이 되어가면서도 가장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넷플릭스입니다. (이미지: 넷플릭스)
스스로 더 기울이는 운동장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의사 결정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HBO의 이름을 바꿨던 당시 진행했던 리서치에서는 HBO라는 이름을 가진 스트리밍 서비스에 돈을 낼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HBO는 보통 미국 동서부 연안 지역의 대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라는 인식이 컸기도 했죠. 

하지만 HBO라는 브랜드만으로도 우선 그 콘텐츠를 좋아하는 수백만의 구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고, 그 이름을 중심으로 다시금 더 큰 브랜드 마케팅을 해나가는 선택을 하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합리적이었습니다. 또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필히 콘텐츠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이 익숙한 이름을 더욱 빠르게 퍼뜨릴 방법이 있었을걸로 보이죠.

일각에서는 "HBO라는 쿨한 브랜드를 버리고, 맥스라는 아무 레거시도 그 의미도 없는 이름을 가져오는 결정이 말이 되는가?"와 같은 반응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슬라브와 경영진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답에 맞춘 조사 결과를 따랐던 것이죠.

이번에 세서미 스트리트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결정도 큰 틀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흐름 속에 있습니다. 워너브라더스는 디스커버리와 합병 이후 어려워진 회사 경영 상황을 이유로 카툰 네트워크(Cartoon Network)라는 소중한 콘텐츠 제작소를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카툰 네트워크는 <파워퍼프 걸스> 등 미국 어린이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왔죠. 그 전에 이미 벅스 버니를 포함한 유명 프랜차이즈인 루니 툰스도 역시 활용하지 않고 있었고요.

메가히트는 없었지만 카툰 네트워크는 매니아 팬층을 만드는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계속 생산하고 있던 채널입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페파 피그>와 <코코멜론> 등 큰 인기를 얻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확대하고, 디즈니 역시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큰 축으로 삼는 동안 자신들이 외연을 넓힐 영역을 줄여버리고 있는 것이죠.

세서미 스트리트를 놓은 것은 성인 콘텐츠에 집중한다는 큰 경영 전략 위에서 하나의 결정이지만, 어찌 보면 잘못된 경영 전략이 실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큰 상징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PBS 동시 방영 결정까지 내리면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모습은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 입장에서는 쓰라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이고요.

결국 돌고 돌아 이 이름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지: HBO)
잘못된 결정을 끊어내지 못하면
이미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지만,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의 모습은 그 운동장을 스스로 더 기울어지게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참고로 워너브라더스와 디스커버리는 합병 이후 이익을 낸 적이 없습니다. 작년에는 오히려 2023년 대비 매출도 줄어들었고, 전체 사업의 재구조화 작업 등을 이유로 순손실은 113억 달러(약 15조 7280억 원)에 달했습니다.

HBO 콘텐츠가 사실상 성장을 홀로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는 1억 223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했지만, 그 평균 단가가 넷플릭스에 비해 현격히 낮아졌습니다. 넷플릭스의 미국 구독자 평균 단가는 17.26달러인데 반해 HBO 맥스는 11.15달러입니다. 프리미엄 이미지의 HBO 브랜드가 퇴색된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지적하죠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의 모습은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콘텐츠 사업이 얼마나 자리 잡기 힘든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악수를 둔다면 그 몰락을 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죠. 피할 수 있었던, 굳이 안해도 될 선택을 한 결과가 지금의 실적입니다. 

아마도 훗날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에 대한 비화가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훗날이 거대한 전환을 이룩해 낸 성공 스토리보다는 레거시 미디어 기업이 몰락한 이후 <어떻게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거인은 몰락했는가?>와 같은 제목의 아티클이나 책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게 이들의 현실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 큰 기업이 무너지겠어?", "대표적인 방송 채널과 콘텐츠들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는데?", "스트리밍도 구독자가 1억 2000만 명도 넘는다며?"

이에 대한 반박의 답은 단언적으로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합병 이후 매년 손실이 크게 나고, 계속 이어진 경영 전략상의 실수들을 제시하면 무너지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미디어 거인이 무너지는 모습도 자연히 그려집니다. 워너브라더스는 올해 1분기에도 4억 5300만 달러(약 6300억 원)의 손실을 냈고, 올해 전체적으로도 수십억 달러의 손실이 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세서미 스트리트를 비롯해 어린이 프로그램을 놓은 것은 비용을 아끼고 특정 영역의 콘텐츠에 집중한다는 전체적인 경영 전략 속에서 이루어진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지만, 결국 이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외부에서 보기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의사 결정들을 내리고, 곧 턴어라운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큰 위기'에 대한 경고가 본격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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