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을 깔고 있는 애플

[준의 테크 노트] 전략적 후퇴의 의미

2025년 6월 24일 화요일
오늘 이야기는 애플의 WWDC 2025를 비롯해 뒤처진 AI 개발 현황에 대한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포석들이 무엇인지를 전합니다. 애플이 새로운 시대에 이전 같은 동력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여전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태계 모두를 가진 이들이 낼 수 있는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플이라는 기업이 당연히 이대로 물러설 리는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현재의 상황을 진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차분히 바라보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어제 이야기를 통해서는 애플이 AI 모델 스타트업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전해드렸는데요. 오늘 [준의 테크 노트]는 애플이 그와 동시에 다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 준비 중인 사항들을 살펴봅니다.

[빅테크] #리퀴드글래스 #AI모델
포석을 깔고 있는 애플
전략적인 후퇴 후 준비하는 것들
최근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기술 뉴스는 단연코 애플의 연례 개발자 컨퍼런스인 WWDC 2025입니다. AI 개발에 대한 업데이트가 없어 실망스럽다는 초기 반응이 나왔지만, 점점 더 애플의 전략적인 포석일 보이는 컨퍼런스였다는 해석들이 이어지고 있고요.

다른 테크 기업들이 최첨단의 AI 모델을 개발하고, 그 모델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홍보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올해 애플의 WWDC는 사실 완전히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새롭게 바뀐 소프트웨어 디자인 언어, '리퀴드 글래스(Liquid Glass)'를 중점적으로 선보였고, 다양한 앱들의 부가 기능과 생산성 도구들의 기능 향상을 발표했습니다. AI 혹은 애플 인텔리전스가 발표의 중심 주제인 세션은 없었고, 생산성 기능들 내에 여기저기 녹아 있는 수준이었죠.

모두가 자신들이 얼마나 AI를 잘 만드는지 보여주는 경쟁을 하는 가운데 애플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요?

AI 개발에서 뒤처진 애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로운 판을 깔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리퀴드 글래스' 디자인은 위와 같이 버튼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디자인이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래와 같이 시안성과 가시성이 떨어져 보이는 초기 디자인이기도 합니다. (이미지: 애플, MKBHD)
리퀴드 글래스를 내세운 이유
'리퀴드 글래스'는 액체 상태의 유리를 메타포로 삼아, 화면의 상태, 화면에 보이고 있는 콘텐츠, 밝기, 사용자의 터치 등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디자인 체계를 소개한 것입니다. 화면 위에 마치 물방울이 올라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이 디자인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요. 애플 특유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결합 및 디테일에 대한 집착을 아주 잘 드러내 주는 예시이기도 했지만, 유리라는 투명한 소재를 근본에 둔 디자인이니, 버튼 아래에 다양한 콘텐츠가 깔려 있을 때, 버튼들의 시인성과 가시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첫 번째 베타 버전이 출시 된 것이니만큼, 평가 그대로의 디자인이 나올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애플이 왜 리퀴드 글래스 디자인을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리퀴드 글래스 디자인을 리드한 앨런 다이(Alan Dye)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힌트가 나오는데요. 그는 "이 소재는 애플이 만들 미래의 제품, 경험, 상호작용 등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폰이나 맥과 같이 특정 제품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애플이 만들 (하드우어+소프트웨어의) 통합적인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애플의 중앙 디자인 팀이 현재 애플의 모든 제품 디자인을 총괄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하는데, 앞으로 디자인 전체의 통일감이 더욱 강조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주목할 내용은 앞으로 애플은 다양한 기기 운영체제의 버전을 모두 통일한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른 버전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이전과 달리, WWDC 2025를 기점으로 새롭게 발표 되는 OS(운영 체제)는 모두 하나의 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리퀴드 글래스의 현재 나온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렇게 세워진 근본 철학은 디자인을 중시하는 애플 사용자들로서는 특히 환영할 결정이며, 이제는 전 제품 전반에 통일성이 강해져 사용성이 더 편리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애플의 모든 기기에 적용되는 통합적인 디자인 언어인 리퀴드 글래스, 그리고 통일 되는 버저닝(Versioning, 시스템의 버전 관리를 의미) 시스템을 통해 애플은 "어떤 기기를 쓰더라도 통일된, 일관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리퀴드 글래스는 앞으로의 통합적 경험을 위한 포석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기기의 OS 버전이 하나의 체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이미지: 애플)
사용자의 생산성 향상에 초점
애플이 통합된 경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아이패드 및 맥 신규 기능 발표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작업 진행 중인 내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라이브 액티비티' 기능은 아이폰에서만 가능했는데, 이번에 맥에서도 실시간 연동되도록 추가했으며, 심지어 맥 내 '전화' 앱까지 추가했습니다. 아이폰 전화 앱에서 가능한 모든 기능들이 맥에서 바로 가능해진 것이죠.

아이패드에는 '윈도우 시스템'과 '메뉴 바'가 추가되면서, 터치 기반의 '더 큰 아이폰'이었던 아이패드의 정체성이 '더 작은 맥'에 가까워졌습니다.

기존 맥북 에어 등과의 정체성에서 겹치는 부분을 감수하고서라도 모바일의 편의성보다는 '사용자의 생산성'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사용자들은 마치 아이패드가 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작업 방식의 변화나 끊김 없이 맥을 쓰는 방식대로 아이패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패드는 점점 더 맥을 쓰는 것 같은 경험을 선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사용자의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죠. (이미지: 애플)
더 똑똑한 시리를 위한 포석
주목할 소식은 리퀴드 글래스뿐만이 아닙니다. 작년의 WWDC 2024를 통해 야심차게 발표했지만, 차일피일 개발이 지연 되고 있는 'AI가 결합된 똑똑한 시리(Siri)'를 위한 포석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똑똑한 시리는 내년 봄 런칭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이번 발표에선 똑똑해진 시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하나둘씩 소개되었습니다.

먼저 애플이 이번 키노트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AI를 위한 '파운데이션 모델 프레임워크'입니다. 개발자들이 자신이 개발한 서비스에서 애플 인텔리전스의 온디바이스(On-Device) AI 모델을 직접 호출할 수 있도록 연결부를 열어 주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카훗!(Kahoot!)이라는 앱은 수학 문제를 사진으로 찍어 풀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아이폰의 온디바이스 AI 모델을 사용합니다. 온디바이스 모델은 챗GPT나 제미나이에 비해 연산 및 추론 능력은 떨어지지만, 온디바이스 모델이기에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기기 내에서만 연산 되기 때문에 개인 정보가 절대 유출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장점입니다.

어떤 것이 꼭 더 우월한 AI 모델이라고 지금 평가하기보단, 상황에 따라 더 적절한 AI 모델이 존재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개발자들 입장에선 애플의 온디바이스 모델은 무료라는 장점도 있습니다. 원래라면 챗GPT나 제미나이를 조금이라도 이용하려면 오픈AI와 구글에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온디바이스 모델은 사용자 기기에서 직접 돌아가니 개발자가 돈을 낼 필요는 없죠.

이처럼 온디바이스 모델 사용 창구를 열어두었기에, 개발자들은 애플의 AI 모델이 결합된 서비스들을 점점 더 많이 만들게 되고, 이러한 서비스들에서는 똑똑해진 시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작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파운데이션 모델 프레임워크를 통해 애플의 온디바이스 모델을 이용하는 앱들은 시리와 더 강하게 결합하면 호출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등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볼 수 있겠죠.

애플의 파운데이션 모델 프레임워크는 더 똑똑한 시리가 개발되기 위한 핵심 포석입니다. (이미지: 애플)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 포섭 
애플은 개발자가 아닌 일반 사용자가 애플만의 대규모언어모델(LLM)인 '애플 인텔리전스'를 사용할 수 있는 기능도 열어 두었습니다. '단축어'는 기존에도 다양한 앱 간의 조건 연동을 통해 사용자가 원하는 시나리오를 구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능이었습니다.

여기에 '인텔리전스 액션'이라는 애플 인텔리전스를 사용할 수 있는 행동이 추가되면서, 이는 더욱 강력해 졌습니다. 예를 들어, "강의안 노트에 음성 녹음이 추가 되면, 이를 텍스트로 변환해서 내가 기존에 적어 놓은 강의 노트와 비교해 빠진 부분을 알려준다"와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이렇게 만들어진 단축어들을 실행하는 주체만 인간에서 시리로 바뀌게 된다면, 애플이 노리는 '똑똑하고, 개인의 맥락을 알고 있는 시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년에 똑똑해진 시리가 출시될 즈음엔, 애플에선 이미 사용자들이 어떤 단축어들을 어떻게 만들어서 쓰고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들을 많이 수집했을 테고, 시리는 유용한 단축어들을 많이 학습한 채로 출시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파운데이션 모델 프레임워크를 통해 개발자들을, 단축어와 인텔리전스 액션을 통해 일반 사용자들을 애플 인텔리전스 생태계에 끌어드리려는 포석이 미리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깔린 다양한 '액션'들을, 내년에 출시된 시리가 영리하게 실행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겠죠.

'전략적 후퇴'의 의미
유명 테크 산업 애널리스트 벤 톰슨과 블룸버그의 매니징 에디터이자 애플 전문 기자라고 할 수 있는 마크 거먼은 이번 WWDC 2025를 "애플의 영리한 전략적 후퇴"라고 평가합니다. (마크 거먼에 대해서는 어제 이야기에서도 소개해 드렸죠)

구글이 I/O 2025를 통해 최첨단 AI를 공개하고, 이를 통해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애플은 '사용자들이 진짜 원하는 기능들에 대한 집요한 점진적 개선'에 자원을 투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리퀴드 글래스, 파운데이션 모델 프레임워크 및 인텔리전스 액션이라는 '다음 스텝'을 위한 포석들을 여기 저기 깔아둔 것이죠.

이렇게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고 제품을 만들어 나가는 전투가 가장 애플다운, 애플이 자신 있어하는 전투 방식입니다. 

애플이 최첨단 AI 모델 경쟁에서 뒤처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테키들 혹은 얼리 어답터 테크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현재로서는 일반 소비자들이 '최첨단 AI의 적용 속도'를 보고 어떤 제품을 구매할지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패드의 창 조절 기능이 어떻게 되는지, 맥과의 연결성이 더 좋아졌는지 등등 사용성의 디테일한 부분들에서 구매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죠.

이번 WWDC 그리고 애플이 짜놓은 판은 이렇게 더 자세히 봐야 합니다. 전략적 후퇴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고 포석을 깔아 놓은 애플은, 다음 WWDC 혹은 시리의 업데이트를 통해 전세 역전 또한 노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어야 합니다.


글쓴이: 준. O2O 스타트업에서 일했고, 현재는 글로벌 콘텐츠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웹3, AI 등 새로운 기술이 바꾸어 나가는 세상의 모습에 관심이 큽니다.

[준의 테크 노트]는 테크 기업과 그들이 새로이 개발하는 기술과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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