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불안한 신세계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한 시대의 종언과 유럽의 재무장  

2025년 6월 27일 금요일
최근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유럽 전역부터 시작해 전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회의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회의가 시작하기 직전에 참석을 확정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구해 온 방위비 증액(GDP의 5%)을 결의한 이들의 모습은 아주 큰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을 겪지 않은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다가왔음을 인식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방위 지원이 사라지는 상황까지 상상해야 하자 더 절박해졌죠. 그간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주장해 온 '유럽의 방위 주권' 개념은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비웃음을 샀지만, 이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이 '재무장'에 나서게 된다면 지금의 세계 질서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크게는 바이든 행정부 당시부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 군사력을 점점 더 이동해 온 미국의 전략적 움직임은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와 유럽 간의 긴장 태세는 우크라이나 전쟁 너머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요.

오늘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축해 온 유럽의 새로운 세계가 끝났음을 알립니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의 결과는 아주 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고 보면서요. 그리고 80 여 년만에 맞이한 불안한 신세계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짚습니다.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유럽의 불안한 신세계
한 시대의 종언과 유럽의 재무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5%로 증액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 결국 굴복(?) 했다. 지난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32개 나토 회원국들이 채택한 공동 성명은 2035년까지 매년 GDP의 5%를 국방·안보 관련 지출에 투자하기로 명시했다. GDP의 최소 3.5%는 직접 군사비, 주요 기반 시설과 사이버 네트워크, 방위산업 투자 등에 1.5%를 추가로 지출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1월 취임 직후부터 줄곧 "5% 국방비"를 요구해왔다. 

사실 이번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유럽 각국은 미국의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되거나 최악의 경우 나토 탈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나토 탈퇴를 주요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으며, (최근에는 트럼프와 사이가 나빠졌지만 한때는 트럼프 행정부를 좌지우지했던) 전 정부효율부(DOGE) 수장 일론 머스크도 나토 탈퇴를 주장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년 동안 미국은 유럽 대륙의 모든 나토 회원국들에게 궁극적인 안보 보장을 제공해왔다. 만약 미국이 유럽에서 병력과 무기를 철수할 경우, 그동안 미군의 우산 아래 지내왔던 유럽 국가들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위 전략을 세워야만 한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은, 냉전 종식 이후 대규모 군사적 충돌 없이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유럽 대륙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 결국 참가했고, 모처럼 동맹과 통합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결의한 회원국들이 각별히 신경을 쓰기도 했다. (이미지: 나토)
나토가 중요한 이유 복기

트럼프의 전임인 바이든 정권은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 '남의 나라 전쟁'에 거액의 세금을 쓴다는 것은 늘 논란의 대상이었다. 트럼프뿐 아니라 공화당 역시 전쟁 초기부터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돈으로 미국인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리로 바이든 정권을 공격했다. 또한 유럽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미군 병력과 방위비 지출을 일부 더 필요한 지역(예를 들어 중국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는 아시아)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지난 3월 백악관에서 열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트럼프와 부통령 J.D. 밴스가 보인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유럽 국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후 유럽에서는 본격적으로 '자체 무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유럽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트럼프의 기조가 조금씩 변했다는 것이다. 6월 초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회담 후 미국이 나토를 탈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미국이 다시 (1930년대와 유사한) 고립주의에 돌입했다"는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트럼프는 여전히 본인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 대외 안보에 개입할 의사가 충분함을 이란에 대한 군사 작전으로 보여주었다. 


즉 겉으로는 고립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 트럼프 정권의 대외 정책은 트럼프가 원하는 것보다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 사이에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잽싸게 트럼프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작업에 착수, 정상 회의가 열리기 전에 5% 방위비 목표에 회원국 대부분의 사전 합의를 받아냈다. '협상의 귀재'를 자칭해왔지만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전혀 전향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조롱거리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던 트럼프의 체면을 확실하게 살려준 것이다. 취임 이후 확실한 승점을 챙기고 기분이 좋아진 트럼프는 "31개 동맹국과 전적으로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집단 방위에 대한 확고한 의지"도 재확인했다. 

 

현 나토 체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집단 방위권을 언급한 나토 헌장 제5조이다. 흔히 "모두에 대한 공격(Attack Against All)"이라고 불리는 이 조항은, 하나의 나토 회원국이 군사적 공격을 받을 경우, 나토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무력 사용을 포함한 집단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 조항은 80년간 유럽의 방위를 책임져온, 수십만 명의 병력이나 첨단 미사일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집어삼키는 데에 성공할 경우 그 다음 분쟁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폴란드를 예로 들어보자. 폴란드가 자체적으로 영토 방어를 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겠지만,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는 바로 이 헌장 5조 집단 방위권의 보호를 받는다. 러시아군의 탱크가 단 1센티라도 폴란드 국경을 넘는 순간 미국을 포함한 나토 회원국 전체를 공격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직후부터 어떻게든 나토 가입을 원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EU가 군비 증강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면, 그간의 세계 질서도 동시에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맹의 결의가 (잠시) 이뤄지고

트럼프가 "동맹국들과 함께하겠다"라고 천명하면서 유럽은 일단 한시름 놓았다. 5%의 방위비 지출 목표가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미국이 나토를 탈퇴할 경우 자체 재무장에 들어갈 비용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금액일 뿐만 아니라, 어쨌든 여전히 미국이 유럽의 방위에 개입하도록 묶어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회의 공동 성명에는 러시아에 대한 언급이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영토 수호를 유럽 방위의 최일선으로 여겨왔던,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던 기존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복귀하자마자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이해당사자인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배제한 채, 러시아와 단독 협상에 나선 것은 유럽의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전개였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권은 지난 2월 브뤼셀에서 나토 회원국들과 처음으로 인사하는 자리에서 이미 "엄중한 전략적 현실 때문에 미국은 유럽 안보에 주력할 수 없다"며,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럽 내 회원국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통적인 개념의) 유럽 대륙 안보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가야 한다"라고 단언했다. 헤그세스는 이미 국방부에 올여름 말까지 미국 본토 방위 강화와 대중국 억지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국방 전략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은 일단 미국을 동맹의 틀 안에 묶어놓기는 했으되, 향후 어떤 방식으로 자체적인 안보 역량을 키울 것인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미국의 안보 자산을 대체할 것인지 고민해야만 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국가 간 조약이나 공적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깨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휴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관세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게다가 부통령인 밴스 역시 미국으로부터 안보 보장을 받고 싶으면 MAGA와 같은 극우 논리를 유럽에 확산해야 한다는, 여전히 나치즘의 역사를 안고 있는 유럽 정부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인물이다. 


마크로 프랑스 대통령이 주장해 온 유럽의 '전략적 자주성'은 결국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지: 유로 뉴스)
유럽이 본격 무장하게 되면  

결국 일련의 상황들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주장하는 유럽군의 '전략적 자주성(strategic autonomy)'과도 맥이 닿는다. 프랑스는 나토의 창립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주요 회원국이지만, 자국의 군사적 독립성을 열렬히 수호하는 전통이 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당시 미국에 뒤통수를 맞은 프랑스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며 자체 핵무기까지 개발했고, 이후로도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는 대신 자국 방위산업을 밀고 있다. 


한때 미국과 유럽 양쪽에서 모두 '도발적인 백일몽' 정도로 조롱받았던 마크롱의 유럽 방위 주권 개념은 이제 유럽 내에서 조금씩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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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젤라의 한글 이름은 박누리이다. 한국과 일본의 최대 인터넷 기업에서 IPO, M&A, 지분 투자 등의 업무를 담당한 후, 현재는 한국의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서 글로벌 IT 기업과 자본 시장, 거시경제 관련 기사를 큐레이션하여, 페이스북에 소개하고 있다. <중국필패>, <재닛 옐런>,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등 여러 책도 우리 말로 번역한 바 있다.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급변하는 거시경제 환경과 그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각 산업의 이야기를 전하는 롱폼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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