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17화. 여전한 인플레이션 불안과 미국 대선 유튜브와 틱톡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는 매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전쟁의 참상이 생중계되다시피 하고 있지만, 그 영향을 먼 동아시아의 한 켠에서는 크게 느끼기 어렵습니다.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같이 보여지는 이 이미지들에 무감각해진 지 오래일 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오기 전까지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도록 매일 수많은 노이즈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팔레스타인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 2만 명이 넘게 사망했지만 마음 아파하기도 잠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전쟁이 세계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것인지가 관심사로 남죠. 하지만 이렇게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결국 어느 때보다 연결되었지만, 어느 때보다 서로 보는 정보가 달라 단절된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는 것은 어쩌면 '경제 영향'에 관한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중동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큰 영향이 없으리라던 이-팔 갈등은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홍해에서 예멘 후티 반군의 공격으로 전 세계 공급 체인 불안정성이 커지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란과 파키스탄 또한 서로 미사일을 주고받으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는 중이죠.
중동에서의 불안한 정국 확산은 곧 전 세계 공급 체인의 불안정성 증가, 석유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겨우 잡아가는 인플레이션 위험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 경제는 2023년 3.3%의 놀라운 성장을 보여서 인플레이션 정국을 잘 돌파해 온 것으로 평가되지만, 중동 정국의 불안정은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이런 중동의 정세를 꿰뚫고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를 전합니다. 올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현재 중동의 정세를 다잡는 것이 왜 특히 중요한지를 전하면서요. |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중동과 유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여전한 인플레이션 불안과 미국 대선 |
제 54차 세계경제포럼, 일명 다보스 포럼이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다. 전 세계 각국의 정계, 관계, 재계는 물론 국제기구, 시민단체, 언론인, 경제학자 등이 모여 세계 경제의 현안과 해법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다. 2024년 다보스 포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였던 작년보다 훨씬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선 가장 큰 이슈였던 인플레이션이 잡혀가고 있는 데다, 금리 인상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경기 둔화도 예상보다 연착륙했다는 평가다.
우려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왔다. 바로 지정학적 리스크다. 어느새 3년 차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아직 마땅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충돌은 중동 지역을 넘어 홍해와 아덴만 해역의 불안정을 불러오며 간신히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는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휴전 압력을 가하는 한편 영국, 캐나다와 함께 아덴만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세계 질서는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고, 그랜트 섑스 영국 국방장관은 "세계가 전후(Post-war) 시대에서 또다른 전쟁을 목전에 둔(Pre-war) 시대에 돌입했다"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사실 2차 세계대전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중동은 단 한시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는 세계의 화약고 같은 지역이었다. 해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 외에도,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알 카에다의 9.11 테러와 뒤이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레바논 내전,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IS)의 발호, 이란-미국 간 갈등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지겹도록 이어져 온 이 분쟁과 비극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현재도 중동은 다시금 세계 정세의 불안을 야기하는 화약고이다. |
가자 지구는 이런 장면이 매일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지: 로이터) |
시작은 이-팔 갈등이었지만 작년 10월 팔레스타인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무장 테러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포 공격을 개시하고, 이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이스라엘 극우 정부가 보복 공격에 나선 후에도, 인도주의 관점에서 비판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세계 경제 자체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가자 지구라는 극히 좁은 범위 내에서 진행되는 무력 충돌인 데다, 이 지역은 석유가 나지 않으므로, 에너지 수급에 미치는 영향 또한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2022~2023년 겨울, 범유럽 에너지 위기를 불러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비교하기는 애초에 어려웠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느닷없이 이란이 이 판에 뛰어들면서다. 물론 '느닷없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재점화된 시점부터, 미국과 (대체로 친미 성향의 수니파 국가들인) 아랍권에서는 (같은 이슬람이지만 완전히 앙숙 관계인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이란이 지원하는 수많은 무장 단체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마스의 최초 공격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란에 공개적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고, 이 지역에 항공모함과 전투기 부대를 추가 배치했다.
이란도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하마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는 했으나, 직접적으로 개입할 의지는 없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의 무장 단체들의 군사 활동을 주도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노골적인 무력 시위는 피해 왔다.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려 하고 그러다 12월 말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습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고위 사령관이 사망하면서 기류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 다음주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공습으로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하마스의 정치국 2인자로 알려진 살리흐 아루리가 사망했다. 베이루트는 이슬람 수니파-시아파-기독교가 공존하는 레바논에서 이란과 가장 밀접한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의 거점 도시이다.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공격했다는 것은 헤즈볼라와 이란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해가 바뀌어 1월 3일, 이란 중부 케르만에서 열린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의 4주기 추모식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인해 무려 84명이 숨졌다. 이란이 이번 테러를 이스라엘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자, 수니파 지하디스트 단체가 뒤늦게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처했지만, 이란의 국민 감정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압력에 직면한 이란 정부가 군사 행동을 개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 국적 유조선 세인트 니콜라스 호를 나포한 데 이어, 이라크 북부 아르빌의 모사드(이스라엘 첩보 기관)에 미사일 공격을 했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수니파 분리주의 무장단체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파키스탄 영토에 공습까지 감행했다. 이에 파키스탄은 이란 동남부 접경지 보복 공습에 나섰다.
다행히 지난 1월 20일, 파키스탄과 이란 정부는 일단 전격적으로 긴장 완화에 합의했지만 살얼음판 위의 평화라 할 수 있다. |
홍해를 불안정하게 한다는 것은 전 세계 무역의 최소 10% 이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일전에도 커피팟(수에즈 운하의 교훈)을 통해 전했지만, 단 며칠만 이 항로가 막혀도 공급 체인에 끼치는 영향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이미지: 포린 폴리시) |
19세기로 후퇴한 무역 루트 여기까지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골치 아픈 전개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지역 분쟁이라고 애써 축소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와 아덴만에서 민간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전 세계가 피하고 싶었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홍해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세계 물류의 양대 관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홍해-아덴만-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는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30%, 상품 무역량 12%를 담당한다. (예멘은 2014년 이래 10년째 시아파 후티 반군과 수니파 정부군이 내전 중이다. 후티 반군은 이란의, 정부군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지원을 각각 받고 있어, 장기화된 내전으로 국민들의 삶이 초토화된 지 오래임에도 평화가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홍해 항로가 위험해지자 해운 회사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가는 우회 항로로 배를 돌리기로 결정한다. 졸지에 해상무역 루트가 19세기로 후퇴한 셈이다. 자사 선박이 드론 공격을 받은 덴마크의 머스크와 독일의 하팍-로이드 등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메이저 해운사들도 예외는 없었다.
하필이면 세계 물류의 또 다른 관문인 파나마 운하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수위 저하로 통과 선박 수를 제한하고 있는 와중에 터진 악재여서 더욱 뼈아프다.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파나마 운하 통과가 여의치 않자 그동안 많은 선사들이 반대편 수에즈 운하-홍해 항로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제 그 홍해 항로조차 힘들어진 것이다.
남아프리카 항로는 홍해 항로보다 거리는 약 9000킬로미터, 기간으로는 9~10일이 더 걸린다. 당연히 아시아-유럽 간 해상운임이 일제히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운임 상승은 곧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간신히 잡히는가 싶었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불길에 다시 기름을 부을 위험이 있다.
심지어 이런 종류의 인플레이션은 실제 경제 성장을 동반하지 않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 후폭풍이 좋지 않다. 지난 2년간 금리 인상의 고통을 감내하며 전방위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벌여온 각국 정부들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후티 반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딜레마에 빠졌다. 후티 반군과의 분쟁이 격화될수록 홍해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바이든은 최근 네타냐후와 직접 통화를 하면서 지금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군사 작전을 축소하라는 압박을 했다. 지난주 통화가 어제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고, CIA 국장도 이스라엘-하마스 간 인질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정보당국 그리고 카타르 총리 등을 만나기 위해서 급파되었다. 일단 여러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이미지: AFP) |
미국의 '외교력'이 중요한 시점 문제는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에게 현재 중동의 시국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우방이었지만, 이번 이-팔 사태에서는 국내 여론이 심상치 않다. 공격을 먼저 시작한 쪽은 하마스지만, 이후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2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봉쇄된 가자 지구의 참상이 드러나자, 바이든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반이스라엘 정서가 불붙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바이든 정권 내부에서도 확산되면서 바이든의 발목을 잡고 있다.
... |
☕️☕️ 중동은 왜 지금 특히 중요한 걸까요? 지금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이슈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분석과 새로운 시선을 전해드려요. 테크, 리테일, 미디어, 에너지 영역의 새로운 이야기들 꾸준히 받아보세요.
+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꼭 확인해 보세요. 이번 메일은 커피팟을 구독하신 적이 있거나,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께 전하는 첫 2개월 50% 할인 링크를 포함했어요. 더 할인된 연간 구독도 가능하니 아래 버튼 눌러 보세요! |
☕️ 글쓴이를 소개합니다 안젤라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인터넷 기업에서 IPO, M&A, 지분 투자 등의 업무를 담당한 후, 현재는 한국의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서 글로벌 IT 기업과 자본 시장, 거시경제 관련 기사를 큐레이션하여, 페이스북에 소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등 여러 책도 우리 말로 번역한 바 있다.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주목해야 할 거시경제 변화와 그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각 산업의 이야기를 전하는 롱폼(Long-from) 아티클입니다. 급격히 변하는 거시경제 지형 속에서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할 이야기를 전할게요. |
☕️
good@coffeepot.me
© COFFEEPOT 2023 |
|
|
2024년 다보스 포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였던 작년보다 훨씬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선 가장 큰 이슈였던 인플레이션이 잡혀가고 있는 데다, 금리 인상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경기 둔화도 예상보다 연착륙했다는 평가다.
우려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나왔다. 바로 지정학적 리스크다. 어느새 3년 차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아직 마땅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충돌은 중동 지역을 넘어 홍해와 아덴만 해역의 불안정을 불러오며 간신히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는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사실 2차 세계대전과 이스라엘 건국 이후, 중동은 단 한시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는 세계의 화약고 같은 지역이었다. 해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 외에도,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알 카에다의 9.11 테러와 뒤이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레바논 내전,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IS)의 발호, 이란-미국 간 갈등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느닷없이 이란이 이 판에 뛰어들면서다. 물론 '느닷없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재점화된 시점부터, 미국과 (대체로 친미 성향의 수니파 국가들인) 아랍권에서는 (같은 이슬람이지만 완전히 앙숙 관계인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이란이 지원하는 수많은 무장 단체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마스의 최초 공격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란에 공개적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고, 이 지역에 항공모함과 전투기 부대를 추가 배치했다.
이란도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하마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는 했으나, 직접적으로 개입할 의지는 없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의 무장 단체들의 군사 활동을 주도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노골적인 무력 시위는 피해 왔다.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려 하고
그러다 12월 말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습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고위 사령관이 사망하면서 기류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 다음주에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공습으로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하마스의 정치국 2인자로 알려진 살리흐 아루리가 사망했다. 베이루트는 이슬람 수니파-시아파-기독교가 공존하는 레바논에서 이란과 가장 밀접한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의 거점 도시이다.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공격했다는 것은 헤즈볼라와 이란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해가 바뀌어 1월 3일, 이란 중부 케르만에서 열린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의 4주기 추모식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인해 무려 84명이 숨졌다. 이란이 이번 테러를 이스라엘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자, 수니파 지하디스트 단체가 뒤늦게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처했지만, 이란의 국민 감정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압력에 직면한 이란 정부가 군사 행동을 개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 국적 유조선 세인트 니콜라스 호를 나포한 데 이어, 이라크 북부 아르빌의 모사드(이스라엘 첩보 기관)에 미사일 공격을 했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수니파 분리주의 무장단체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파키스탄 영토에 공습까지 감행했다. 이에 파키스탄은 이란 동남부 접경지 보복 공습에 나섰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골치 아픈 전개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지역 분쟁이라고 애써 축소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와 아덴만에서 민간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전 세계가 피하고 싶었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홍해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세계 물류의 양대 관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홍해-아덴만-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는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30%, 상품 무역량 12%를 담당한다. (예멘은 2014년 이래 10년째 시아파 후티 반군과 수니파 정부군이 내전 중이다. 후티 반군은 이란의, 정부군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지원을 각각 받고 있어, 장기화된 내전으로 국민들의 삶이 초토화된 지 오래임에도 평화가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홍해 항로가 위험해지자 해운 회사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가는 우회 항로로 배를 돌리기로 결정한다. 졸지에 해상무역 루트가 19세기로 후퇴한 셈이다. 자사 선박이 드론 공격을 받은 덴마크의 머스크와 독일의 하팍-로이드 등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메이저 해운사들도 예외는 없었다.
하필이면 세계 물류의 또 다른 관문인 파나마 운하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수위 저하로 통과 선박 수를 제한하고 있는 와중에 터진 악재여서 더욱 뼈아프다. 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파나마 운하 통과가 여의치 않자 그동안 많은 선사들이 반대편 수에즈 운하-홍해 항로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제 그 홍해 항로조차 힘들어진 것이다.
남아프리카 항로는 홍해 항로보다 거리는 약 9000킬로미터, 기간으로는 9~10일이 더 걸린다. 당연히 아시아-유럽 간 해상운임이 일제히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운임 상승은 곧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간신히 잡히는가 싶었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불길에 다시 기름을 부을 위험이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후티 반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딜레마에 빠졌다. 후티 반군과의 분쟁이 격화될수록 홍해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11월 대선을 앞둔 바이든에게 현재 중동의 시국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우방이었지만, 이번 이-팔 사태에서는 국내 여론이 심상치 않다. 공격을 먼저 시작한 쪽은 하마스지만, 이후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2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봉쇄된 가자 지구의 참상이 드러나자, 바이든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반이스라엘 정서가 불붙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바이든 정권 내부에서도 확산되면서 바이든의 발목을 잡고 있다.
수신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