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이 전부를 결정하는 일본의 한계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24화. 과거처럼 바라보기 어려워진 냉정한 현실

2024년 8월 18일 일요일
일본은 지금 소위 '오버 투어리즘'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역대 가장 큰 규모의 해외 관광객이 놀러 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를 즐기는데, 오랜 기간 임금 인상이 정체되어 온 일본 국민들은 이런 효용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물가 상황에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진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서 마이너스 금리를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은 일본은행과 일본 정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금리 차이를 이용한 앤케리 트레이드 자금이 크게 빠져나가는 등 엔화로 빌려 투자한 자산을 처분하는 이들이 몰리면서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주식시장이 크게 흔들리는 충격이 이어졌죠. 

이후 시장 안정을 찾기 위한 조치와 메시지가 나오고, 일본을 비롯한 각국 주식 시장은 회복을 했지만 한 가지 큰 사실이 드리워졌습니다. 바로 일본 경제는 통화 정책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죠. 일본은 엔저가 유지되어야만, 최근 겨우 끌어올린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됩니다.

어쩌다가 일본 경제는 이렇게 통화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일까요? 게다가 30년 간의 엔저와 디플레이션이 이어져 온 상황은 앞으로 일본 경제가 신흥국 지위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게 하는 중입니다.

이번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모든 것이 통화 가치에 달려 있는 '정상적이지 않은' 일본 경제의 현실을 진단합니다. 일본 경제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려면 모두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현실이 있다는 것을 짚으면서요. 과거처럼 일본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엔이 전부를 결정하는 일본의 한계
과거처럼 바라보기 어려워진 일본 경제의 냉정한 현실
현재 일본 경제는 엔, 즉 통화 정책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 블룸버그

거시 경제와 거꾸로 가기 시작한 엔화

마켓 애널리스트나 이코노미스트가 아니어도, 자본시장 참여자들이 글로벌 거시 경제 환경을 파악할 때 꼭 봐야 할 지표를 3개만 꼽으라고 한다면 1) 미국의 소비, 2) 미국의 고용, 그리고 3) 엔·달러 환율이(었)다. 

왜 과거형을 썼냐 하면, 세 번째인 엔·달러 환율이 거시 경제 지표로서 가지는 의미가 지난 몇 년간 점점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비와 고용은 연준의 향후 금리 움직임과 그에 따라 시장에 풀리는 돈의 양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다. 엔·달러 환율은 그와는 약간 다른 관점으로 (엔화를 발행하는 일본 경제를 보는 시각과는 별개로) 글로벌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나 위험 회피 심리를 한눈에 보기에 좋은 지표(였)다. 엔화는 오랫동안 '안전 자산'으로 여겨져왔고, 미국이 금융 위기나 경기 침체 조짐을 보이면 엔·달러 환율은 어김없이 급락(엔화 가치 상승)했다. 

불과 3년 전인 2021년 8월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10엔 수준이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시킨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가 지속되는 동안 엔·달러 환율은 줄곧 달러당 100엔을 밑돌았고, 가장 심각했을 때에는 달러당 70엔대를 찍었다. (지난 금요일인 8월 16일의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48엔이다. 엔화 가치가 지금의 두 배 이상이었다는 뜻이다.)

엔·달러 환율이 글로벌 거시 경제와 반대로 가기 시작한 것은 2021년 말부터다.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풀었던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한 에너지, 식량 가격의 상승이 누적되어 인플레이션이 폭발했고, 연준을 비롯한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화들짝 놀라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올릴 때 유지한 제로 금리의 결과

그런데 여기서 일본은행만이 독자 행보에 나섰다. 숙원인 30년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일본은행은 나 홀로 꿋꿋이 제로 금리를 밀어붙였다. 환율은 상대적 지표다. 달러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자 엔화는 급락했고, 이 상태가 3년 가까이 지속됐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그 3년 동안 여전히 탄탄했다. 양국의 금리차가 5%가 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엔화를 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 3년 동안 일본은 에너지를 포함한 수입 물가 급등에 힘입어 어느 정도 디플레이션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따라왔다.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할 경우 치솟은 물가는 고스란히 가계 경제에 타격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진정한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서는 물가도 물가지만 소득 증가가 절실했다. 생활비가 무섭게 오르며 소비 여력이 줄어든 가계가 주머니를 닫기 시작하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기업들도 불만이 없지 않았다. 엔저는 수출에는 유리하지만 원자재 수입 가격을 끌어올린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제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의 애환이 클 수밖에 없다. 일본상공회의소 소속 중소기업 2000개 중 약 70%가 6월 조사에서 희망 환율을 달러당 110~135엔 사이라고 답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의 지지율이 자고 일어나면 최저치를 경신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경제 상황에 시민들이 화가 날 대로 났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7월 말 일본은행의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 일순간 큰 충격을 줬다.


엔화 폭등을 불러온 금리 인상의 결과

일본은행이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17년 만에 제로금리의 종언을 고한 데 이어 마침내 7월 31일, 단기정책금리를 0.25%로 인상하며 실질적인 플러스 금리로 돌아섰다. 단기금리 0.25%는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 직후 금리가 0.3% 전후였던 2008년 12월 이후 15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6조 엔(약 54조 원) 규모의 월별 채권 매입 프로그램 역시 2026년 봄까지 절반 수준인 약 3조 엔으로 축소할 것이라고 밝히며 대규모 금융완화를 끝내고 '정상적인' 통화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여기에는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목표 범위 안에 들어왔다는 판단도 한몫했다. 일본은행은 금리 추가 인상에 대해 "2%라는 물가 목표가 지속적·안정적으로 실현돼 나가는 등 금융완화 정도를 조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일본 소비자물가는 6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2.6% 오르는 등 27개월째 2%대를 기록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계의 소득 증가이다.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실질 임금은 5월에는 1.3% 감소했으나 6월에는 1.1% 증가해 27개월 만에 처음으로 상승했다. (즉, 지난 27개월 동안 정말로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른 것이 맞다!) 명목 임금은 4.5% 증가해 1997년 1월 이후 27년 만에 가장 빠른 증가율을 기록 중이다. 6월에는 특별 수당도 7.6% 증가했다. 

종합하면, 기업들이 더 많은 임금과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기업들은 올해 평균 임금을 5.10% 인상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는 33년 만에 가장 큰 인상 폭이다. 기업의 경영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초과근무수당도 6월까지 1.3% 누적 증가해 전달보다 증가 폭을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가 활기있게 잘 돌아가고 있어서, 기업들이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해 가며 노동자들이 일을 더 많이 한다는 의미이다. 기본급, 상여금, 초과근무수당이 모두 증가하니, 노동자들이 집에 가져오는 소득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제로에 가까운 저금리 정책을 고수해 온 (1995년 이래 1% 위로 올라갔던 적이 없다)  일본은행이 기지개를 켜자 글로벌 금융 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더욱이 미국 연준이 연내 금리 인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 전환은 거대한 변화였다. 달러당 160엔에 육박하며 붕괴에 가까운 가치 하락을 보였던 엔은 며칠 사이에 10% 가까이 상승하며 140엔대에 안착했다. 

시장의 예상을 거스른 금리 인상과 이로 인한 엔화 가치 급등은 세계 최대 규모의 '캐리 트레이드'에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국가의 통화로 돈을 빌려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로금리인 일본의 엔화를 빌려 미국 달러 채권에 투자한다고 치자. 단순 계산만으로도 양국의 금리차인 5.5%의 수익을 앉아서 벌 수 있다. 

특히 지난 3년은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려왔기 때문에, 엔캐리 트레이드의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금리가 인상되고 엔화 가치가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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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를 소개합니다.
안젤라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인터넷 기업에서 IPO, M&A, 지분 투자 등의 업무를 담당한 후, 현재는 한국의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서 글로벌 IT 기업과 자본 시장, 거시경제 관련 기사를 큐레이션하여, 페이스북에 소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등 여러 책도 우리 말로 번역한 바 있다.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주목해야 할 거시경제 변화와 그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각 산업의 이야기를 전하는 롱폼(Long-from) 아티클입니다. 급격히 변하는 거시경제 지형 속에서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할 이야기를 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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