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기민하게 움직인 EU 철강, 화학공업 등 에너지 소비량이 큰 산업계가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찾아온 지난 12월부터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난방비, 전기료 인증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잇따라 올라오기도 했다.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한 EU의 경제적 피해는 1조 유로(약 137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EU와 유럽 국가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미국 및 카타르 등으로 공급 다변화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평시라면 수많은 정치적 장애물을 맞닥뜨렸을 천연가스 터미널 (천연가스는 수출국에서 액체 상태로 적재, 운반한 뒤 수입국에서 기체 상태로 변환하여 각 수요처로 공급하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설비를 갖춰놓은 시설) 건설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리는 와중에 7000억 유로(약 961조 3870억 원)가 넘는 지원금도 뿌렸다.
정부들이 공급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에너지의 최종 소비자인 기업과 가정도 수요 절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는 실내 난방 온도를 19~20℃ 이하로 제한되었고, 시민들은 예년 대비 많게는 수십 배 오른 난방비와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온갖 묘수를 짜냈다. 모건 스탠리에 따르면 EU 최대 경제인 독일의 에너지 사용량은 과거 5년 평균 대비 16퍼센트나 떨어졌다.
해가 바뀌고 봄이 성큼 다가온 현재, 유럽의 에너지 사정은 어떨까. 유럽의 에너지 비축율은 오히려 평년보다 높은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2021년 유럽의 에너지 비축율은 52% 수준이었으나, 2022년 겨울에는 84%에 달했고, 독일은 무려 91%의 비축율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하늘이 EU와 우크라이나 편(?)이었다. 유례없이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유럽 시민들은 큰 희생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고, 러시아산 가스 없이도 최소한의 가스 공급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더욱이 올해 경기 전망이 안 좋은 유럽의 에너지 수요는 작년보다도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가스 가격의 안정 그 사이에 천연가스 가격은 어느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1년 전인 2022년 2월, 유럽의 천연가스 도매가를 나타내는 더치 TTF 선물 가격은 1메가와트시 당 88유로 정도였으나, 올해는 76유로 안팎에 불과하다. 겨울을 앞두고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에 대한 공포가 정점을 찍은 작년 8월에는 무려 340유로가 넘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안정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근거 없는 공포가 아니었다. 전쟁 전 러시아의 유럽 가스 시장 점유율은 40%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의 가스 가격은 여전히 높고 (2년 전과 대비하면 거의 5배에 가깝다), 가스비와 전기료를 내야 하는 소비자들의 고통 역시 그대로다. 공장들은 높은 에너지 비용 때문에 생산 차질과 가격 인상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를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EU가 러시아 제재 항목을 천연가스에서 석유 및 석유 제품으로까지 확대하면서 물류와 운송업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 우려되고 있다.
하지만 공포에 가까운 우려를 떨치고 이제 "러시아 가스 없어도 경제가 돌아간다"라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면서 EU와 유럽 국가들은 이제 전쟁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위원회는 이제 천연가스 가격의 안정 등으로 피할 수 없어 보였던 경기 침체를 피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에너지 위기가 2023년 겨울에도 되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했지만, 사실 이번 겨울의 경험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가고 있는 시점에 일종의 탄소 절감 예행연습과도 같았다는 평가다. 반강제적으로 이 연습에 참여한 유럽의 반응은 "해볼 만하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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