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2화. 이 드라마는 어떻게 끝이 날까? 리즈 트러스(Liz Truss) 내각이 출범한 9월 이후 영국은 그야말로 격랑의 정국을 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는 모두 새로운 정부가 자초한 일이라고 보는 시각이 큽니다. 인플레이션 대응이 시급한 시기에 대규모 감세안을 들고나와 이를 바라보는 이들 모두를 걱정하게 하며 비판을 받았죠.
결국 사과하고 정책을 되돌리며 늦게나마 수습에 나서고 있는데요. 이들은 왜 스스로 더 큰 파장과 경제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정책을 밀어붙였던 걸까요? 과연 어떤 의도로 시도를 했었던 걸까요? 그리고 그 시도는 어쩌다 이렇게 위험한 일이 된 걸까요?
오늘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2화는 일련의 과정을 숨 가쁘게, 중요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전합니다. 최근 영국의 상황을 왜 세계가 주목하게 했는지, 그 상황을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해 바라보게 해줍니다. |
[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2화. 영국발 경제 스릴러가 향하는 결말 |
드라마 같았던 장관의 사임 10월 13일 목요일 저녁, 미국 워싱턴 DC의 주미 영국대사관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 중이던 영국의 재무장관 크와시 쿠르텡(Kwasi Kwarteng)은 자신의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급하게 행사장을 뛰쳐나가 런던행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날인 14일 금요일 오전, 리즈 트러스(Liz Truss) 영국 총리는 쿠르텡의 경질을 발표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신임 리즈 트러스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쿠르텡의 임기는 불과 38일, 20세기 이후 두 번째로 짧은 기록이다. (최단 기록은 1970년 에드워드 히스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더 이언 맥클러드인데, 이 경우는 경질이 아닌 심장마비로 인한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한 것이므로, 사실상 쿠르텡이 최단기로 "잘린" 재무장관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셈이다.) "트러스와 쿠르텡은 작은 정부와 자유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한 개의 뇌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정치적, 이념적 동지이자 오랜 친구였던 쿠르텡을,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 경질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현재 리즈 트러스 내각이 마주하고 있는 거시 경제의 역풍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와 함께 막을 올려 (본의 아니게) 영국에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상징성을 안고 출항한 리즈 트러스 내각은 시장과 유권자들의 거센 반발에 벌써 좌초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영국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영국은 총리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면서 또 다른 대격변기를 맞이한 와중에 큰 혼란을 겪었다. |
애초 영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작금의 경제 상황은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간, 전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 저금리 시대를 거쳐왔다. 일반적으로 저금리가 지속되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저금리와 인플레이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같은 의미, 즉 돈의 가치가 낮다는 말이다. 저금리는 적은 비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돈이 아닌 다른 것들의 가격을 끌어올린다. 인플레이션은 가격 상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계가 지난 30년간 저금리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비교적 물가 상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 라나 포루하(Rana Foroohar)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화, 더 정확하게는 중국이 공급하는 값싼 노동력과 러시아가 공급하는 값싼 에너지 덕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중국 간의 본격적인 디커플링이 거의 2년 안에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팬데믹은 노동력 부족과 공급망 붕괴, 그리고 각국 정부의 유례없는 재정확장을 불러왔는데 이 세 가지만 놓고 봤을 때 2021년에 인플레이션 우려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느냐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팬데믹으로 인한 불황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역대급 규모로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ed),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IMF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통화정책의 큰 축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이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이미 2021년 초부터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일각에서 나왔고, 이들 기관들도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인플레이션보다는 경기 회복이 더딘 것을 더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렸고, 그로 인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버블이 심해졌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가게 문을 닫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구매력이 회복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 1차 백신 접종과 함께 일상 회복에 대한 희망이 겨우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21년 여름의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인플레이션에 선제 대응을 하겠다면서 금리를 올리는 것은, 적어도 2021년 가을 시점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최악의 변수가 터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예상되었던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놀라운 분전을 보여주면서 장기화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 값싼 에너지를 공급해온 나라고,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식량 공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가 가해지고, 국토를 침략당한 우크라이나의 경제와 식량 생산능력, 그리고 물류망이 망가지면서 이미 인플레이션 촉발 요소가 충분했던 글로벌 거시경제는 그야말로 폭탄을 맞았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에너지와 식량 가격은 불과 반년 만에 무서운 속도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값싼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의존해왔던 유럽 국가들은 당장 이번 겨울 난방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
가스는 아마 올해 유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아닐까? 가스 공급 위기에 더해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도 멈춰서면서 안 그래도 불안하던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
전 세계 공동의 적: 인플레이션 상황이 급변하니 각국 중앙은행들의 입장도 돌변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위기 인식과 상황 대처가 늦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은 미국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감수하더라도 금리를 빠르고, 크게 올리겠다는(이른바 빅스텝) 방향 선회를 공공연하게 천명했다. 미국은 올해 들어 5월에 0.5%, 6월에 0.75%, 7월에 0.75% 금리를 올렸고, 8월 한 달을 쉰 뒤, 9월에 다시 0.75%를 올렸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인상 속도다. 금리란 쉽게 말해 돈의 가치라고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미국의 금리가 이렇게 단기간에 급상승했다는 것은 곧 미국의 통화인 달러화의 가치가 그만큼 급등했다는 뜻이다. 2022년 들어 달러화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통화를 상대로 초강세를 보여왔다. 달러의 가치가 올라가면 투자자들은 가치가 낮은(=금리가 낮은) 다른 나라 통화를 내다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 모두가 팔려고 하면 해당 통화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자국의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 자본 유출이 일어난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연준을 따라 금리를 올리는 것 외에 달리 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당장 2012년 이후 계속 금리를 내리기만 했고 2016년 이후로는 아예 제로금리를 유지해온 ECB가 석 달 동안 무려 1.25%의 금리를 올리면서 빅스텝 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ECB는 EU 경제가 금리를 올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항변해 왔음에도, 미국발 금리인상으로 인한 유로화 급락, 에너지+식량 가격의 쌍끌이 급등에 결국 투항한 것이다.
의도가 좋아도 중요한 건 타이밍 각국 중앙은행(심지어 그중에는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 BOE)도 포함되어 있었다)과 정부들이 금리 올리고 돈줄 조이느라 분주한 이 와중에, 리즈 트러스 내각은 출범하자마자 그야말로 뜬금없는 재정 정책을 발표한다. 이른바 "미니 버젯(Mini Budget)"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예산안의 골자는 450억 파운드(약 72조 5000억 원) 규모의 강력한 감세안이다. 감세와 규제 완화만이 저성장 터널에 갇혀 있는 영국의 성장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트러스와 쿠르텡의 시각이었다. 문제는 부족한 세수를 어디서 벌충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예산은 정해져 있고, 심지어 문제의 예산안에는 이번 겨울에 난방비 폭탄을 걱정해야 하는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600억 파운드(약 95조 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감세안으로 인해 세수는 줄어든다. 그렇다면 모자란 돈을 어디서 끌어올까? 가장 직관적인 답은 “빌려오는 것”이 되겠다. 즉 대규모 국채 발행이다. 9월 23일 "미니 버젯"이 발표되자마자 글로벌 채권 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투자자들은 미친 듯이 영국 국채를 내던졌다. 길트(Gilt)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국 국채 투매 사태가 벌어지며 국채 가격은 폭락하고 수익률은 급등했다. (채권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한다) 일반적으로 국채, 특히 영국과 같은 준 기축통화국의 국채는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 간주되는데, 영국 국채 시장의 발작은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에 불안을 야기했다. 국채 수익률의 급등은 기준 금리 상승과 유사한 효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금리(=돈의 가치)가 오르니 파운드화의 가치도 올라야 하는데, 시장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영란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는데, 정부의 재정 정책은 역방향으로 질주했다. 결국 물가 안정과 성장 모두 달성하지 못하고 고금리 탓에 정부 빚만 늘어날 거라는 비관적 예상이 우세했던 것이다. 한 국가의 경제 전망이 어두우면 당연히 그 나라 화폐의 가치는 떨어진다.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마구 내다팔면서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채 가격과 함께 동반 추락했다. |
어느덧 파운드는 너무 약해졌고, 달러가 너무 강해졌다. 둘의 환율은 거의 1:1 비율에 다다르기도 했다. (현재 1파운드 = 1.13달러) |
지옥이 되어버린 영국 금융시장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가장 먼저 위기에 맞닥뜨린 곳들은 국민들의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연기금들이었다. 연기금들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부채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은 물론 레버리지도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레버리지 거래에는 금리 변동 등 각종 리스크를 헷징하기 위한 증거금이 필요한데, 국채 가격이 요동치면 헷징 비용이 늘어나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을 당하게 된다. 증거금을 지불하기 위한 현금이 필요해진 연기금들은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팔고, 이 매도로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 또다시 증거금 증액 요구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국 국채 가격의 폭락은 연기금 파산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리먼 브러더스급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고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연기금들은 영란은행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마진콜에 직면한 연기금들이 9월 28일 오전 대규모 국채 매도를 피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영란은행은 27일 저녁 재무부와 긴급회의를 열었고, 28일 아침, 10월 14일까지 20년물 이상 장기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는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내놓았다. 국채 매입으로 국채 가격과 파운드화의 동반 (상승) 안정을 유도했고, 일단 영국은 연기금들의 줄도산을 시발점으로 하는 파국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형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영국 정부였고, 이번 사태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 모든 것이 정부가 "미니 버젯"을 발표한 지 1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경질당하기 바로 전날, 쿠르텡이 미국 워싱턴DC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를 만난 자리에서 “트러스 내각의 재정정책이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는) 영란은행의 통화정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쓴소리를 듣고 자존심을 구긴 것도 다 그럴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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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의 매크로 시선]은 주목해야 할 거시 경제 변화와 그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각 산업의 이야기를 전하는 롱폼(Long-form) 아티클입니다. 급격히 변하는 거시 경제 지형 속에서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할 이야기를 전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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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의 매크로 시선] 2화.
영국발 경제 스릴러가 향하는 결말
드라마 같았던 장관의 사임
10월 13일 목요일 저녁, 미국 워싱턴 DC의 주미 영국대사관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 중이던 영국의 재무장관 크와시 쿠르텡(Kwasi Kwarteng)은 자신의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급하게 행사장을 뛰쳐나가 런던행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날인 14일 금요일 오전, 리즈 트러스(Liz Truss) 영국 총리는 쿠르텡의 경질을 발표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신임 리즈 트러스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쿠르텡의 임기는 불과 38일, 20세기 이후 두 번째로 짧은 기록이다. (최단 기록은 1970년 에드워드 히스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더 이언 맥클러드인데, 이 경우는 경질이 아닌 심장마비로 인한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한 것이므로, 사실상 쿠르텡이 최단기로 "잘린" 재무장관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셈이다.)
"트러스와 쿠르텡은 작은 정부와 자유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한 개의 뇌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정치적, 이념적 동지이자 오랜 친구였던 쿠르텡을,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 경질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현재 리즈 트러스 내각이 마주하고 있는 거시 경제의 역풍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와 함께 막을 올려 (본의 아니게) 영국에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상징성을 안고 출항한 리즈 트러스 내각은 시장과 유권자들의 거센 반발에 벌써 좌초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영국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애초 영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사실 작금의 경제 상황은 영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간, 전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 저금리 시대를 거쳐왔다. 일반적으로 저금리가 지속되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저금리와 인플레이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같은 의미, 즉 돈의 가치가 낮다는 말이다. 저금리는 적은 비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돈이 아닌 다른 것들의 가격을 끌어올린다. 인플레이션은 가격 상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계가 지난 30년간 저금리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비교적 물가 상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 라나 포루하(Rana Foroohar)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화, 더 정확하게는 중국이 공급하는 값싼 노동력과 러시아가 공급하는 값싼 에너지 덕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중국 간의 본격적인 디커플링이 거의 2년 안에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팬데믹은 노동력 부족과 공급망 붕괴, 그리고 각국 정부의 유례없는 재정확장을 불러왔는데 이 세 가지만 놓고 봤을 때 2021년에 인플레이션 우려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느냐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팬데믹으로 인한 불황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역대급 규모로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ed),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IMF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통화정책의 큰 축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이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이미 2021년 초부터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일각에서 나왔고, 이들 기관들도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인플레이션보다는 경기 회복이 더딘 것을 더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렸고, 그로 인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버블이 심해졌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가게 문을 닫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구매력이 회복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 1차 백신 접종과 함께 일상 회복에 대한 희망이 겨우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21년 여름의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인플레이션에 선제 대응을 하겠다면서 금리를 올리는 것은, 적어도 2021년 가을 시점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최악의 변수가 터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예상되었던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놀라운 분전을 보여주면서 장기화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 값싼 에너지를 공급해온 나라고,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식량 공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가 가해지고, 국토를 침략당한 우크라이나의 경제와 식량 생산능력, 그리고 물류망이 망가지면서 이미 인플레이션 촉발 요소가 충분했던 글로벌 거시경제는 그야말로 폭탄을 맞았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에너지와 식량 가격은 불과 반년 만에 무서운 속도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값싼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에 의존해왔던 유럽 국가들은 당장 이번 겨울 난방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공동의 적: 인플레이션
상황이 급변하니 각국 중앙은행들의 입장도 돌변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위기 인식과 상황 대처가 늦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은 미국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은 감수하더라도 금리를 빠르고, 크게 올리겠다는(이른바 빅스텝) 방향 선회를 공공연하게 천명했다.
미국은 올해 들어 5월에 0.5%, 6월에 0.75%, 7월에 0.75% 금리를 올렸고, 8월 한 달을 쉰 뒤, 9월에 다시 0.75%를 올렸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인상 속도다. 금리란 쉽게 말해 돈의 가치라고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미국의 금리가 이렇게 단기간에 급상승했다는 것은 곧 미국의 통화인 달러화의 가치가 그만큼 급등했다는 뜻이다. 2022년 들어 달러화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통화를 상대로 초강세를 보여왔다.
달러의 가치가 올라가면 투자자들은 가치가 낮은(=금리가 낮은) 다른 나라 통화를 내다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 모두가 팔려고 하면 해당 통화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자국의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 자본 유출이 일어난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연준을 따라 금리를 올리는 것 외에 달리 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당장 2012년 이후 계속 금리를 내리기만 했고 2016년 이후로는 아예 제로금리를 유지해온 ECB가 석 달 동안 무려 1.25%의 금리를 올리면서 빅스텝 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ECB는 EU 경제가 금리를 올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항변해 왔음에도, 미국발 금리인상으로 인한 유로화 급락, 에너지+식량 가격의 쌍끌이 급등에 결국 투항한 것이다.
의도가 좋아도 중요한 건 타이밍
각국 중앙은행(심지어 그중에는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 BOE)도 포함되어 있었다)과 정부들이 금리 올리고 돈줄 조이느라 분주한 이 와중에, 리즈 트러스 내각은 출범하자마자 그야말로 뜬금없는 재정 정책을 발표한다.
이른바 "미니 버젯(Mini Budget)"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예산안의 골자는 450억 파운드(약 72조 5000억 원) 규모의 강력한 감세안이다. 감세와 규제 완화만이 저성장 터널에 갇혀 있는 영국의 성장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트러스와 쿠르텡의 시각이었다.
문제는 부족한 세수를 어디서 벌충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예산은 정해져 있고, 심지어 문제의 예산안에는 이번 겨울에 난방비 폭탄을 걱정해야 하는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600억 파운드(약 95조 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감세안으로 인해 세수는 줄어든다. 그렇다면 모자란 돈을 어디서 끌어올까? 가장 직관적인 답은 “빌려오는 것”이 되겠다. 즉 대규모 국채 발행이다.
9월 23일 "미니 버젯"이 발표되자마자 글로벌 채권 시장은 경기를 일으켰다. 투자자들은 미친 듯이 영국 국채를 내던졌다. 길트(Gilt)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국 국채 투매 사태가 벌어지며 국채 가격은 폭락하고 수익률은 급등했다. (채권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한다) 일반적으로 국채, 특히 영국과 같은 준 기축통화국의 국채는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 간주되는데, 영국 국채 시장의 발작은 글로벌 금융시장 전반에 불안을 야기했다.
국채 수익률의 급등은 기준 금리 상승과 유사한 효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금리(=돈의 가치)가 오르니 파운드화의 가치도 올라야 하는데, 시장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영란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는데, 정부의 재정 정책은 역방향으로 질주했다.
결국 물가 안정과 성장 모두 달성하지 못하고 고금리 탓에 정부 빚만 늘어날 거라는 비관적 예상이 우세했던 것이다. 한 국가의 경제 전망이 어두우면 당연히 그 나라 화폐의 가치는 떨어진다.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마구 내다팔면서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채 가격과 함께 동반 추락했다.
지옥이 되어버린 영국 금융시장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지자 가장 먼저 위기에 맞닥뜨린 곳들은 국민들의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연기금들이었다. 연기금들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부채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은 물론 레버리지도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레버리지 거래에는 금리 변동 등 각종 리스크를 헷징하기 위한 증거금이 필요한데, 국채 가격이 요동치면 헷징 비용이 늘어나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을 당하게 된다. 증거금을 지불하기 위한 현금이 필요해진 연기금들은 보유하고 있던 국채를 팔고, 이 매도로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 또다시 증거금 증액 요구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국 국채 가격의 폭락은 연기금 파산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리먼 브러더스급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고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연기금들은 영란은행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마진콜에 직면한 연기금들이 9월 28일 오전 대규모 국채 매도를 피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영란은행은 27일 저녁 재무부와 긴급회의를 열었고, 28일 아침, 10월 14일까지 20년물 이상 장기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는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내놓았다.
국채 매입으로 국채 가격과 파운드화의 동반 (상승) 안정을 유도했고, 일단 영국은 연기금들의 줄도산을 시발점으로 하는 파국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형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영국 정부였고, 이번 사태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 모든 것이 정부가 "미니 버젯"을 발표한 지 1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경질당하기 바로 전날, 쿠르텡이 미국 워싱턴DC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를 만난 자리에서 “트러스 내각의 재정정책이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는) 영란은행의 통화정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쓴소리를 듣고 자존심을 구긴 것도 다 그럴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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